동엽신 [439425] · MS 2018 · 쪽지

2015-11-23 13:07:49
조회수 2,699

간만의 오르비 문학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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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금은 아무도 모르지만 예전에 저는 오르비 문학을 몇 편 연재한 적이 있었습니다...ㅋㅋㅋㅋ
역마를 끝으로 절필하는 듯 했지만..차마 끊을 수 없네요ㅋㅋㅋ
어제 모든 수시가 끝났으니 기념으로 오르비 문학 하나 써 보았습니다.
방금 떠올라서 급히 쓴거라 매끄럽지 않지만 즐겁게 읽어주세요.ㅎㅎ

[앞의 줄거리]
'나'는 아내와 강남 모처에서 상위권 중심의 재종반을 운영하고 있다. 권씨네의 딱한 사정을 들은 '나'는 기준 미달의 성적에도 불구하고 권씨네를 받아주게 된다. 그러나 권씨 부부는 독재를 하고 싶다며 수업을 거부하고 자습을 강행하게 되고, 성적은 오를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나'와 아내는 학원의 실적이 타격을 입을까 두려워 하게 되는데.... 

불을 끈 다음에 아내가 다시 소곤거려 왔다. “당신두 보셨죠? 오늘사 말고 영기 엄마 성적이 유난히 더 떨어져 보였어요. 혹시 사람들이 우리학원 학생인걸 알까봐 남의 일 같지 않아요. 여섯 달이나 공부해놓고 33333이니 원…….”

“당신더러 대신 수능치라고 떠맽기진 않을 거야. 걱정 마.” 나는 그날 밤 학원이 망하는 꿈을 꾸었다. 우리 학원에서 33333를 배출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파산을 하게 되는 꿈이었다.

아내가 권 씨네에 대해서 갑자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해서 권 씨 부인의 그 금방 박살날 것만 같은 6평 성적표에 관한 관심이었다. 말투로 볼 때 학생들이 학원을 비우는 시간 동안이면 더러 접촉도 가지는 모양이었다. 수능일 도 모르더라면서 아내는 낄낄낄 웃었다. 재수생이 자기 수능일도 몰라서야 말이 되느냐고 핀잔했더니, 까짓것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어차피 때가 되면 털리기는 마찬가지라면서 태평으로 있더라는 것이었다. 권 씨는 여전히 자신의 커리를 구하지 못한 채였다. 일정한 커리가 없으면서도 아침만 되면 운동복을 입고 뻔질나게 교대 운동장으로 나가곤 했다. 타고난 지력도, 그렇다고 타고난 뚝심도 없으면서 계속해서 운동장 같은 데 나가 뜀박질을 하는 눈치였다.

(중략)

그렇다고 권 씨나 권 씨 부인이 우리에게 터놓고 도움을 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우리로 하여금 그런 꼴을 목격하고도 도울 마음을 먹지 않으면 도무지 인간이 아니게시리 상황을 최악의 선까지 잠자코 몰고 갈 뿐이었다. 애당초 이 순경이 기대했던 그대로 산타클로스 비슷한 꼴이 되어 알텍이나 리로직 따위를 슬그머니 문간방 부엌에다 넣어 주고 온 날 저녁 이면 아내는 분하고 억울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나는 엄마나 철부지 애들을 생각한다면 그까짓 알량한 선심쯤 아무렇지도 않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제게 딸린 등급조차 변변히 건사 

못하는 한 얼간이 사내한테까지 자기 선심의 일부나마 미칠 일을 생각하면 괘씸해서 잠이 안 올 지경이라고 생병을 앓았다. 권 씨가 여간내기 아니라고 속삭이던 게 엊그제인 걸 벌써 잊고 아내는 책상 잘못 내줬다고 두고두고 자탄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여전히 성적이 시원찮은 상태에서 권 씨 부인은 어언 9평의 날을 맞게 되었다. 9평이 끝난 지 꽤 오래되는 모양이었다. 아내의 귀띔으로는 점심 무렵이 지나서부터 그런 다고 했다. 저녁을 먹다가 나는 자습실에서 울리는 괴상한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되게 몸살을 하듯이 끙끙 앓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몸의 어딘가에 깊숙이 칼이라도 받는 양 한 차례 처절하게 부르짖고는 이내 도로 잠잠해지곤 하면서 이러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그것이 책상을 내준 이후로 처음 듣는 권 씨 부인의 목소리였다.

“당신이 한번 권 씰 설득해 보세요. 제가 서너 번 얘길 했는 데두 무슨 남자가 실실 웃기만 하믄서 그저 염려 없다구만 그러네요.” 
수업 얘기였다.
“권 씨가 거절하는 게 아니고 자존심이 거절하는 거겠지.” 아내는 진즉부터 독재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을 더러 는 흉보고 또 더러는 우려해 왔었다. “33333을 갖구서 요즘 세상에 그래 재수를 그것도 수험생 혼잣힘으로 보겠다니, 아무래두 꼭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애요. 달이 다 차도록 인강 하나 완강 못하는 여편네나 맨날 밖으로 겉도는 사내나 어쩜 그리 짝짜꿍인지!”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나서 나는 권 씨를 로비로 불러냈다. 듣던 대로 권 씨는 대뜸 아무 염려 말라면서 실실 웃었다. 마치 곤경에 빠진 나를 극진히 위로해 주는 투였다. “현역 때도 마누라 혼자서 거뜬히 봤거든요.”
“우리가 염려하는 건 권 선생네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 서요.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일이라도 일이 잘못될 경우 난 권 선생을 원망하겠소.” 작자가 정도 이상으로 느물거린다 싶어 나는 엔간히 모진 소리를 남기고는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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