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수능 국어에 필요한, 짧은 내신식 공부법
안녕하세요.
제가 처음으로 글을 쓸 당시에 '나는 시험장에서 본 독서 지문 3개 모두,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모님께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있었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오늘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다들 이걸 1~2월, 혹은 3월에만 시작했어도 국어 점수가 유의미하게 바뀌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장점 2가지를 대략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실전에서 빠른 속도의 풀이 가능
(2) 실전에서 아예 모르는 지문은 나오지 않음
그런데 생각해보면 (1)은 (2)에 포함되는 내용 아닐까요? 대부분 한 번쯤 들어봤거나, 아예 알고 있는 지문이다 보니 빠르게 푸는 것도 훨씬 쉬웠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수능 국어의 정점은 다른 분들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 독특함 덕에 많은 관심을 받은 거겠지만, 어찌 됐든 이 부분은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내신식 공부는 흔히 말하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이며 특히 수능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예를 들어 문학에서 비, 바람 같은 시어를 보자마자 '시련'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면, 이건 수능에 적합한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겠죠. 내신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게 수능의 가장 큰 특징이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내신식 공부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방법 덕에 현역 수능 때부터 독서에서 전혀 모르는 내용의 지문은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이야기입니다.
내신식 공부를 하되, 짧게 끝내자.
무슨 의미일까요? 예를 들어 내가 기출 분석을 하다가 헤겔 지문을 봤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학생들은 "문장 구조는 이렇고, 맥락상 동의어 나오고 ... 선지에서 오답 논리는 선후 관계 바꾸기구나. 이건 병렬인데 포함 관계로 제시해서 낚시했구나." 정도의 생각을 하겠죠. 제가 써 놓은 내용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출 분석'에 들어가긴 합니다.
읽다 보면 기억에 남는 것이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해당 지문의 기출 분석이 끝나면 바쁜 수험생으로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죠. 잠시 쉬었다가 바로 다음 지문(또는 다른 과목 공부)으로 넘어갑니다.
제가 나름의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다들 저렇게 넘길 때, 저는 마지막 5분 동안 분석이 끝난 해당 지문을 외웠습니다. 그리고 까먹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어떻게 5분 동안 본 걸 계속 기억할까요?
기출 분석이 끝난 뒤, 여러분의 머리 속에는 지문의 내용이 대략적으로 다 들어 있을 겁니다. 그 감각을 가진 상태에서, 지문을 마지막으로 읽은 다음에, 1문단부터 내용 설명을 쭉 해보세요. 혼잣말이어도 좋고, 저는 가족들이랑 밥 먹을 때 했던 거 같네요. 이렇게 하면, 중간에 막히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헤겔은 절대 정신에 세 가지 형식이 있다고 보았는데..."라고 말하다가 끊기면, 나는 예술 종교 철학이 절대 정신에 들어간다는 것을 잊어버린 거죠. 그런 식으로 "뭐가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라고 느끼는 부분이 뇌에 제대로 담기지 않은 내용입니다. 혹시 본인의 이름이나 생일을 잊어버리신 적이 있나요? 아마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데,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납득된 정보'는 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공부하는 것은 당연히 내신식 공부입니다. 1문단부터 쭉 외워서 설명한다는 게 내신 시험 범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부연 설명을 덧붙여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이 지문을 영단어 암기하듯이 외운 게 아닙니다. 대충 읽어 놓고 외워'지기'를 바라는 입장이죠. 당연히 훨씬 덜 힘들 겁니다. 두 번째로, 어차피 다시 나오지 않을 지문이라고 해도, 내용 자체는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완전히 그대로 다시 나오지는 않을 것이기에 며칠을 투자해서 '진짜 내신 공부'를 할 필요가 없이 딱 그 순간에만 하면 되는 겁니다. 저는 기출 / 연계 교재 / 사설 모의고사 지문들에 대해서 모두 이런 방법을 적용시켰습니다. 한 번에 배경 지식을 공부하려고 하면 전문 서적도 가져다 놔야 할 거 같고 그렇지만, 그때그때 흡수한 배경 지식은 설령 까먹는다 하더라도 비슷한 내용을 마주했을 때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가장 핵심적인 배경 지식은 기출에 있다고 거듭 강조했었고, 연계 교재 + 사설 N제 / 모의고사 내용까지 포함하면 따로 공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이것도 예전에 역사 과목의 암기에 대해 설명드렸던 것처럼, '기반'을 다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런데 몇 번 하다 보면 대략 어떤 느낌의 내용들이 나오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위에서 말한 기반이 다져진 거죠. 그 이후부터 저는 새로운 느낌의 지문을 볼 때마다 하나씩 추가만 하면 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공부하는 족족 지식이 느는 단계에 들어선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력이 늘다 보면 다른 시너지 효과 역시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분명 외워'지기'를 바라면서 그냥 읽었을 뿐인데, 습관이 반복되다 보면 의도적으로 외우려고 하는 암기력 자체도 향상됩니다. 늘 강조하던 '나만의 말'로 바꿔서 이해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암기'되는' 수준까지도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1. 아예 모르는 지문도 아닌데 2. 보면서 외울 수 있다면
시험장에서 엄청난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시간적인 측면에서 부담을 많이 느끼는데, 사실 수능 국어 비문학 정도 길이의 어린이용 전래 동화를 읽는다면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적인 길이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럼 왜 시간이 부족할까요? 내가 읽었던 내용을 진짜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니까, 이게 맞는지 아닌지 계속 지문 - 문제 - 지문 - 문제 이런 식으로 왔다갔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글을 쓰더라도, 리스크가 있을 만한 공부법을 논하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작년의 '극단적 시간 단축 - 문학편' 역시 그랬습니다.
그냥 지문 분석 끝내고 쉴 시간에, 내가 무슨 지문을 읽었고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대충 중얼거려보기만 하면 됩니다. '나만의 말'로 바꾸는 연습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했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같은 맥락입니다. 저렇게 혼잣말로 곱씹어보는 것 자체가 '나만의 말'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니까요.
작년 기출도 봐야 하나, 기술 지문은 안 겹치지 않냐 하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그냥 다 보시면 됩니다. 정점에 오르고 싶은 사람은 무언가 거르는 습관 자체를 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래도 아무 말 없이 그냥 보라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지니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기술 지문 같은 경우에는 그 내용 자체가 겹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게 맞습니다.
22수능을 기준으로 저는 비문학 3지문 중에 2.5지문을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헤겔과 브레턴우즈는 안 읽고도 풀 정도였지만 기술 지문은 그렇지 않았죠. 0.5지문을 알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그 내용 자체가 뭔지는 몰라도, 전반적인 흐름이나 용어의 활용에 있어 익숙한 상태이고 다른 배경 지식으로 얼마든 커버가 가능하다는 거죠.
예를 들어 22수능 기술 지문을 보면 '카메라가 3차원 실세계를 2차원 영상으로 크기가 동일한 물체라도 카메라로부터 멀리 있을수록 더 작게 나타나는데 ...'이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걸 보고 저는 '그림 그리면 뒤에 있는 게 더 작게 나타나는 거니까 당연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3차원을 2차원으로 변환할 때 활용되는 1점 투시도법 / 2점 투시도법에 대한 지문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전에 봤던 예술 지문을 기술 지문을 푸는 데 활용했습니다. 왜일까요? 해당 부분에 있어서는 내용이 완전 똑같으니까요. 그러니 사실 내용을 전부 다 알지 못한다고 해도 지문을 이해하거나 문제를 푸는 데 시간이 덜 드는 것은 당연하겠죠.
결국 특정 내용을 거르지 않고 모든 지문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배경 지식은 더 이상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전문 서적을 구한다고 한들, 수험생 입장에서 그걸 들여다 볼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썼던 이야기는 제 칼럼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출판 당시에 감사하게도 메일로 이런 내용을 보내신 분이 계셨는데, 저도 모르는 제 칼럼의 정체성을 알려주셨었죠. 실제로 저는 구조 독해나 제재별 특징에 대해 그렇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올해 수능을 잘 보셨을지 궁금하네요. (혹시 보고 계신다면 연락이라도 한 번 주세요)
문학도 가능할까?
비문학 위주로 글을 쓴 것 같은데, 혹시 문학에서는 불가능한 걸까요? 가능합니다. 문학 칼럼은 나중에 따로 올리겠지만, 고전 시가 / 산문의 클리셰 기억하기, <보기> 내용 외워지도록 공부하기 두 가지가 포인트입니다. 제가 <보기>를 안 읽고도 풀 수 있다고 말했고, 요즘의 트렌드는 점점 더 제가 말씀드렸던 내용 일치 / 과해석에서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저런 말씀을 드렸을 때, <보기>를 안 읽고 풀 수 있는 이유에는 그 내용을 이미 다 알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문학 기출 분석 이후에는 <보기>를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읽어보세요. 풀 때, 분석할 때, 그리고 마지막 한 번까지 <보기>를 총 3회독하게 되는 건데, 이건 아무리 외우기 싫어도 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보기>도 대부분 늘 나오는 내용만 나오기 때문에 '문학적 배경 지식' 차원에서 유의미할 겁니다. 이것도 내신식 공부를 짧게 하는 방법의 일환입니다.
또한 위에서 말한 대로 고전 파트에서는 늘 나오는 주제 의식과 작품의 흐름이 있고, 이를 기억해두는 데 내신식 공부를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들려드린 이야기를 수능 전까지 (파이널 모의고사 때도) 실천해보셨으면 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쳐보면서 누구라도 가능한, 리스크는 없는 공부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 방법도 그 중 하나이니 한 번쯤 믿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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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수능아 우리 일단은 좀 천천히 만나자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내일 한번 해볼게요
항상 너무 좋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칼럼들을 써보고 싶은데 생각보다 쉬운게 아니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ㅠㅠ
저보다 훨씬 대단하신 분이니까 잘 하실 수 있을 거에요
그냥 아는 걸 써 내려간다는 느낌으로 하나씩 시작해보세요
제 예전 글을 보면 아시겠지만 초반부 글들은 하나 같이 레이아웃도 별로고 글 호흡도 길고, 문단 바꾸기나 이런 것도 적절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하다 보니까 되는 느낌? 이라는 걸 언젠가 공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말씀 감사하고 민달팽이님도 파이팅입니다!
칼럼 읽을수록 국어에 대해 하나씩 얻어가는 느낌입니다 ㅎㅎ
설마 또..?
저도 뭔가 본능적? 으로 이런식으로 공부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도움이 되었어요
쌓이면 쌓일수록 수능 때 보상받으실 거에요!
그쵸 국어 지문 공부할때 외우진 않는데 외우는(완벽하게 이해하려고 하니 자동적으로 외워지는..) 그런 느낌으로 했던 것 같아요
국어쪽 과외나 일은 안해도 지금도 비문학 제재랑 일부 내용은 기억이 좀 나요
그런 맥락에서 회독의 의미가 분석에만 있는 것도 아닌 거 같아요 완벽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겹쳐지면 웬만하면 다 기억이 나니까요.
말하자면 다른(?) 분야에서 글을 쓰시는 분인데, 글 쓰실 때마다 잘 보고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 쓰신, 칼럼에 대한 칼럼은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네요 ㅎㅎ
칼럼들 보다가 독서의 경우 배경지식이 중요하다 하셨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살면서 책을 거의 읽은 적이 없고, 뉴스나 신문 등도 본 적이 없는, 소위 말하는 상식과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그런 학생에게 배경지식(with 상식)책 추천 가능한가요? 아니면 시중에 나와있는 독서 배경지식 책 아무거나 봐도 상관이 없을까요?
배경지식 책이라는 건 무의미합니다.
기출 + 연계교재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합니다
'전자(E-)' '경상수지' '간접점유' '선의취득' '형이상학' 이정도의 단어도 모르는 앤데도 괜찮나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럼 지문과 문제까지 모두 풀고 외우는건가요 아니면 문제 풀기 전인가요?